2년 6개월동안 잘 살던 집에서 부당하게 쫒겨나기 직전,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우리각시와 작은 전시를 열었거든요.
원래 있던 짐들과 가구들을 다 빼고 벽에 그 흔적을 남겨놓았습니다.
옛 WG 멤버들 사진을 모아 소금에 묻었습니다.
중요했지만 이젠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서류들을 다 분쇄했습니다.
그렇게 정든 집을 떠나, 또 다른 소중한 집을 얻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그 때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갑자기 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문득 저의 오래된 카메라가 꼭 그 집을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라는 절대자는 출시 당시 최고의 미러리스였던 이 카메라를 초라하게 만들어놓고는, 제게 그를 떠날 것을 강요합니다.
2013년 초봄부터 이어진 우리의 인연을, 그 절대자가 끊어내려 합니다.
이제는 여기저기 번들거리고 뒤쪽 가죽도 다 떨어진 채 가끔 오작동을 내는 나의 낡은 카메라.
녀석은 여전히 2400만화소라는 꽤 괜찮은 스펙과 유려한 디자인을 갖고 있습니다만, 엄청나게 흔들리는 동영상 결과물 때문에 저는 요즘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5축손떨방에 디자인도 아름다운 pen-F, 혹은 20만원이면 구할 수 있는 가성비 최고의 e-p5...
불행히도 저는 그저 돈없는 유학생일 뿐이라, 남들처럼 쉽게 기변할 처지는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지요.
가끔은 수동렌즈로, 또 가끔은 자동렌즈로. 저는 몽글몽글한 보케가 참 좋습니다.
그래서일까요... 2002년 이후로 지금까지 꽤 많은 수동렌즈들을 써봤습니다.
넥스-7 이 녀석에겐 타쿠마 50mm f1.4, 헬리오스 58mm f2.0, 코시논 50mm f1.8, 그리고 주피터-8 50mm f2.0를 물려봤네요.
지금 남아있는 건 주피터-8 뿐이지만요. 아무래도 미러리스의 경박단소의 미덕을 해치지 않는 유일한 m39 렌즈인 까닭이겠지요.
비록 최소초점거리가 무려 1미터나 될 뿐만 아니라 최대개방에서 엄청나게 소프트하지만, 쉽게 못버리겠더라구요.
예전에 장터에도 내놓아봤지만 아무도 둘러보지 않더군요.
지금은 그게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공부하냐구요?
네, 전 독일에서 미대를 다니고 있습니다.
카셀, 아마 모르시는 분들이 더 많을 이 작은 도시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합니다. 벌써 내년이면 졸업이네요.
한국에선 조각을 전공하고 대학졸업 후엔 사진작가였던 제가, 여기서는 코스튬을 만들어 영상작업을 합니다.
재미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시고, 또 어떤 분들은 멋지다고 하십니다.
뭐, 저야 끌리는 대로 살 뿐입니다. 스스로도 제 삶이 그리 순탄해 보이진 않네요. ㅎㅎㅎ
올해는 원없이 전시를 보며 돌아다녔습니다.
2017년엔 스위스 바젤아트페어, 독일 카셀도큐멘타, 독일 뮌스터조각프로젝트,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가 열렸습니다.
사실 이렇게 겹치기도 쉽진 않지요. 베니스비엔날레는 2년에 한번, 카셀도큐멘타는 5년 에 한번, 뮌스터조각프로젝트는 무려10년에 한번 열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올 해 베니스에선 비엔날레 기간에 맞추어 데미안 허스트의 개인전도 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하지만 이 낡은 카메라는 개인작업이나 기타 전시를 기록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진 않습니다.
훨씬 더 많은 비율로 녀석의 센서에 맺히는 것은 주변 풍경, 그리고 사람들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 풍경보단 인물을 더 담아온 것 같습니다.
제 눈엔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눈빛이나 몸짓, 혹은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그 사람의 감정을 카메라에 오롯이 담아내는 순간이야말로,
그 어떤 대화만큼이나 진솔한 시간이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여행을 가서도 장대한 풍경을 광각으로 담는 것보다 그 곳의 사람들을 더 많이 찍어온 것 같습니다.
원래부터 풍경에 큰 관심이 없다보니 넓은 화각의 렌즈도 거의 산 적이 없었고, 그러다보니 이런 현상도 더 심해지는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요즘엔 동영상 촬영 때문에 16-50 번들렌즈가 땡기더군요.
만약 제가 이 렌즈를 산다면, 시그마 19mm f2.8 은 장터행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시간이 나면 가끔씩, 집에 있는 소중하거나 오래된 물건을 담습니다.
집 안 작은 불빛,
각시의 곰돌이 인형,
저의 낡은 노트북 X60,
며칠 전 데려온 작은 수채화고무나무,
친구들과 만들어먹은 스프링롤,
그리고 저의 아주아주 오래된 모자.
여기저기 뜯어지고 헤져서 손바느질로 꼬매기도 여러 번 했지만 아직 버릴 마음은 없습니다.
오랜 고민 끝의 저의 결론입니다.
저는 낡은 친구 넥스 7을 버리는 대신에 싸구려 짐벌을 하나 구입했습니다.
여행가방이 더욱 무거워는 지겠지만, 아직도 팔팔한 녀석을 버리기엔 우리가 함께 한 시간과 고생의 순간들이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더 시간이 흘러 녀석이 더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면, 그 때 내려놓아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소윤아빠_NX20] 사실 저도 예전에 삼성으로 기변할까 고민한 적이 있었어요. NX30 이었는데, 제 눈엔 왜그리도 매력적이던지요! 소윤아빠님 닉네임을 보니 여전히 삼성바디에 대한 애정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댓글 정말 고마워요... 사람. 맞아요... 지금까진 그게 제 결론이에요.
소중한 사용기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진과 일상... 그리고 소소한 이야기들이 NEX-7은 이미 한 가족이었음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래서 떠나보내기도 아쉬우실 듯. 저도 추억이 담긴 카메라들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거든요.
새로만나게 될 짐벌이 새생명을 불어넣을 것 같네요.^^
[네모세상] 고마워요!!! 아직은 돈을 많이 쓰기가 좀 어려워서, 저렴한 5만원짜리 짐벌을 샀어요. 아마 2-3일 내에 배송이 될거래요. 네, 이미 넥스7에 정을 너무 많이 줬네요. 아직 2400만화소도 쓸만하구요. (여행 첫 3장은 네모세상님이 보내주셨던 걸로 찍은 겁니다 ^^)
한작품한작품 보면서 가슴속으로 몬가 오네요 사소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모 그런거~~ 또한 낡은 장비가 뿜어내는 멋진 사진들 ~~역시 장비는 거들뿐 이란걸 다시 한번 느낌니다~ 저는 프로란 의미가 돈을 많이 벌기 보단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그것을 해석하거나 표현하는자로 생각 합니다~~ 좋은 작품들 감상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몇년간 국외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다보니 먼 곳에서 고생도 많으셨겠지만 정말 멋진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진에서도 열정과 감성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한장 한장 참 멋진 사진들입니다.
올 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다가오는 2018년 원하시는 것 모두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예전에 slr 에서 사진 자주 봤었는데 (누드에 대한 독특한 시도들, 참 좋아서 님 사진 볼 때마다 늘 추천드렸지요)
독일에 가계셨군요^^
카메라와 함께 근황을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사람 속 원시성과 변화무쌍함에 대한 탐구 여전하시네요.
사진의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는 사람이란 말씀에 공감합니다.
아마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람이란 존재는 참 여러모로 아름답고 신비로운 대상이란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종종 사진이든 작품 근황이든 이곳에서 볼 수 있음 좋겠네요.
지구 어디에 계시든, 새해에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적멸] 반가워요 적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렇게 다른 공간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어찌보면 그게 사는 맛 아닐까 합니다. 제 예전 작업들도 기억해주셔서 더욱 고마울 따름입니다. 독일로 넘어와서 꽤 변한 제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은 환경적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구나 하는 묘한 기분에 젖고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이든 스냅사진이든, 여전히 인물상에 집중하는 개인적 취향은 또한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느낍니다. 아마도 더 오래 살면 더 중요한 차이점과 공통점을 알게 되겠지요. 적멸님의 일과 취미생활 모든 것이 더욱 꽃피길 기원할게요. 늘 행복하십시오!!!!!
사진들 정말 너무 잘봤습니다 ㅠㅠ 사진기를 얼마나 좋은 상태로 최신의 상태로 유지하느냐 보다 얼마나 본인의 눈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느냐가 중요한지 정말 느껴지고 귀찮은 저를 반성하게 되는 글과 사진들이었습니다 ㅠ 앞으로도 좋은 사진 많이 볼 수 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ㅎ
[BENJUN] 한 일본기자가 썼던 기고문 중에, 명기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디자인이라고 하더라구요..자기 마음에 들고 손에 들고싶어야 더 많은 촬영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하던데, 저도 동의합니다. 다행히 이 놈은 제 눈에 예뻐보이고 자주 누르게 되어서, 아마도 다음에 다른 기기를 쓰더라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댓글 고맙습니다. 같이 즐겁게 사진생활해요 벤준님... ^^
제목보고 그냥 들어왔는데 범상한 사진들에 글까지 다 읽었습니다. 바디 탓만 하는 나를 되돌아 보고 부끄러웠습니다.
사용기 잘 보았고 지름신이 들때마다 다시 와서 보겠습니다.
감동으로 사진들보다 작은 사진기로 찍고 계시는 셀카 마지막 사진을 보니 웃음이 머금내요. 건강하시고 유학생활 잘 하십시오.
[추억을담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유학생활 잘 해낼 것 같습니다 ㅎ 저도 늘 무언가를 사고싶고 바꿈질하고 싶어하는걸요. 아마 그건 카메라를 들 힘조차 없어지는 날이 와도 계속되지 않을까요?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아마도, 자기만족의 크기와 기기사용의 방향이 아닐까 해요.
앗... 코스튬 작품 사진은 본 적이 있었는데... 소미클에서 였는지... 별다른 설명이 없어 궁금했었는데 오늘 이해했네요.
진짜 사진들과 글... 숨 죽이고 봤어요. 사진 전시회 때 작가들이 사진 배치와 순서로 몇 날 몇 일을 고민한다던데... 이유를 알겠네요.
정말 멋진 에세이와 멋진 사진들... 많이 배웁니다.
카셀 생활은 어떠세요? 저는 프랑크푸어트에 삽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선장님 작품 감상해봤으면 싶네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미틴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작업이 다른분들께 공감을 얻는것만큼 행복한 일도 또 없겠지요.
프랑크푸어트암마인에 사시는군요. 저도 종종 갑니다. 친한 친구가 살기도 하고, 공항이용도 거의 이쪽이라서요.
예, 시간나면 만나서 이야기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에 인화물로 출력된 사진작업은 하나도 없고 지금은 또 비디오 코스튬작업중이어서 볼 게 있나모르겠어요.
혹시라도 카셀미대 놀러오실 일 있으면 제 자리에서 차나 한잔 하시지요... ^^
[나는여우[Lv7]] 저는 영상촬영을 위해 안타깝게도 올 4월에 녀석을 처분했어요. 하지만 자꾸 생각나네요. 저감도 스틸컷의 퀄리티는 엄청났으니까요. 아직 가지고 계시다니 부러워요... 아마 제 사진이 볼만했다면 그건 제 실력때문이 아니라, 장소와 인물이 좋아서일거에요. (ㅜ.ㅜ)
이걸보니 생각이 많이 바뀌네요. 곧 lx100m2를 들이려고 하는데요. 원래 rx10 첫번째 시리즈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건 망원은 좋지만 1인치라 부족한 느낌이 많았어요. 그래서 마포는 되어야겠다 싶기도 했고 쓰다가 마음에 안 들면 진짜 a7에 2875로 갈까 싶었는데 그게 참 어리석은 생각 같네요. 그냥 제가 잘 찍으면 되는군요. 가벼운 lx100m2를 써야겠네요.
[누군가로부터] 저는 오랫동안 포써즈 바디들을 써왔고 물론 풀프레임바디와 1.5크롭바디도 꽤 써봤어요. 사실 화질차이는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100 % 원본을 보아야만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건 뭐,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큰 센서의 카메라"보다는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카메라"가 좋은 카메라 같습니다. 좋은 댓글 달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신선생님] 아! 오래된 글에 댓글 달아주셔서 고마워요.
저는 비록 이 놈을 지인께 잠시 빌려드리고 GX9을 쓰고있지만, 내년에 다시 녀석들을 돌려받게 됩니다. 음... 설레네요... ^^
시간이 또 흘러갑니다. 이 글을 썼을 때의 고민 중 일부는 해결되고 또 다른 고민들이 쌓이고... 인생이 마치 그렇다고 강변하듯 제 주변의 상황들이 수시로 바뀌어갑니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진 여기 이렇게 꿋꿋하게 서 있어보려구요. ^^